가스펠인(人) 말씀묵상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배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핍박이 있었습니다. 종교인들은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신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열악한 상황에도 그들은 예수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히려 핍박 때문에 복음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기록합니다(사도행전 11장).
그런데 요즘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단어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는 '교회'의 타락이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75.4%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에 놀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가장 큰 원인으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의 복음'이 왜곡되면서 '복음'은 천당행 티켓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울러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천당행 티켓을 판매하는 자들, 즉 기득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어가 오염되었듯, 솔직히 '교회'라는 단어도 더 이상 복음 공동체를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재정 혹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가스펠인(人) 사역은 역사상 처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본질을 회복하고자 성경 말씀을 함께 찾아보는 흩어진 나그네, 즉 필그림을 위한 사역입니다. 요즘 이단들이 기승을 부림으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만을 뜻하지 않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가스펠)을 듣고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가스펠인(人)'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겠으나 온전함을 추구하는 복음 공동체를 세우고 싶은 마음에 가스펠인(人) 사역을 수년 전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가스펠인(人) 사역은 '복음'과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정체성의 회복입니다. 생각보다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채널은 가스펠인(人)들과 동행하고자 만들어졌습니다. 이 채널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된다면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격려와 기도, 댓글, 그리고 후원은 이 시대에 신실하게 복음을 나누고자 하는 사역에 큰 힘이 됩니다.
가스펠인(人) 말씀묵상
사사기 1장 22-3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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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오늘 본문에서는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복하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탐꾼을 보내고 정복하는 과정에서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22절-26절, "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 하매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내매
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곳의 이름이 되니라"
겉으로 보기에는 선대하는 것이며 생명을 살리는 것이니 좋게 보일 수 있지만 그 당시 역사적 맥락을 생각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던 가나안의 일부분을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수용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스라엘 전체에 퍼져 있었습니다. 끝내 가나안을 쫓아내지 않는 등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행동을 합니다.
28절,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묵상 포인트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하늘 문을 보았고 제단을 쌓았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벧엘은 거룩한 기억만 남았을 뿐 실제로는 가나안 문명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벧엘이 아니라 루스입니다. 거룩한 과거는 거룩한 현재나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도 방치되어 표류하면 결국은 자연스럽게 세속화됩니다. 어제의 순종은 감사의 기억이 될 수는 있지만 오늘의 순종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들의 상황은 달랐지만 그들의 선택과 결과는 같았습니다. 모두 어느 지점에서 만족하고 멈춥니다. 이 세상에서 만족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편의와 판단을 앞세우기 시작합니다. 가나안이라는 세상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안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제적 이유였습니다.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고 가나안을 내쫓지 않고 노예로 삼았습니다. 처음에는 철병거가 두려웠지만 나중에는 가나안의 노동력이 아까웠습니다. 처음에는 자신들에게 힘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순종할 의지가 없었습니다. 경제적 안정과 재정적 번영에 눈이 멀면 이 세상을 품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타협입니다. 고민하고 고심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다가오는 타협을 어떻게 하면 알아차리고 밀어낼 수 있을까요?
쫓아내지 않았던 타협이 단 지파에 이르면 오히려 쫓겨나는 무력함이 되고 맙니다 (34절).
세상과의 타협은 처음에는 선택으로 보이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 지파는 땅을 잃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잃었고 비전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차지할 믿음의 비전을 잃어버리니 영적 생명을 잃은 것입니다. 순종을 잃으니 공간을 잃고, 사명을 잃으니 영향력을 잃고, 거룩을 잃으니 영적 주도권도 잃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잃고 성도가 자신의 개인의 축복을 이 세상의 기준으로만 찾고 있다면 이미 우리는 영적 주도권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어쩌면 요즘 교회가 무기력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배경이해
이 단락은 북쪽에 속한 므낫세 반 지파와 나머지 다섯 지파의 정복 전쟁에 대해 다룹니다. 요단강 동쪽은 모세 시대에 정복이 마무리되었으므로 갓, 르우벤, 므낫세 반 지파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등장하는 지파의 순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데, 북으로 갈수록 처참한 실패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는 그들이 더 이상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셉 가문을 언급할 때(22절)를 제외하고 더 이상 여호와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대신 가나안 사람들과 계약을 맺고 그들에게 노역을 시키는 등 불순종의 모습으로 가득합니다.